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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채식주의자 독후감,시점의 변화,독자에게 던지는 메시지

by 올라운더 LEE 2025. 5. 5.

 

채식주의자 책 표지
채식주의자

 

한강 채식주의자 독후감


고기를 거부한 몸, 침묵 속의 저항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한국 현대문학의 대표작 중 하나로, 단순히 ‘채식’을 소재로 삼은 것이 아니라, 억압과 폭력, 육체와 정신, 인간과 자연, 침묵과 저항이라는 다층적인 주제를 탐구하는 작품이다. 특히 이 소설은 주인공 영혜가 육식을 거부하고 식물로 변모해 가는 과정을 통해, 인간성의 본질과 사회가 강요하는 규범적 삶에 대한 강한 문제의식을 드러낸다. 나는 이 작품을 통해 한 인간이 어떻게 사회적 억압과 타인의 욕망에 짓눌려 무너져가는지를 목도했으며, 동시에 그 침묵이 얼마나 강렬한 저항이 될 수 있는지를 절감했다.

소설은 총 세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이라는 제목의 세 단편이 연결되어 하나의 장편소설을 이루고 있으며, 각각 영혜의 남편, 형부, 언니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러한 시점의 분할은 독자에게 영혜의 내면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기보다는, 주변 인물들의 시선을 통해 간접적으로 구성하게 만들며, 이는 오히려 영혜의 침묵을 더 강렬하게 각인시킨다.

첫 번째 장 ‘채식주의자’는 영혜의 남편 시점에서 전개된다. 그는 지극히 평범한 직장인으로, 독특한 성격이나 주관을 가진 아내를 원하지 않았다. 그의 바람은 “눈에 띄지 않는 여성”, “특별할 것 없는 삶”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 영혜는 고기를 거부하기 시작하며 그의 기대를 산산조각 낸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그녀는 악몽을 꾸었고, 그 꿈에서 피가 넘쳐흐르며, 살을 먹는 것이 곧 폭력이라는 자각을 얻게 된다. 남편은 그녀의 변화가 자신의 체면과 가정의 균형을 깨뜨린다고 여긴다. 그는 영혜를 설득하고 강요하고 마침내는 성폭력을 가하며 그녀를 ‘정상’으로 되돌리려 한다. 그러나 영혜는 끝내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이 장은 영혜가 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혜가 본래 갖고 있던 감수성과 내면이 외부로 드러난 것일 뿐임을 보여준다. ‘채식’이라는 단어는 윤리적 실천으로 이해되기보다는, 폭력의 순환을 끊고자 하는 무언의 외침으로 읽힌다. 하지만 그 외침은 주변 인물들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오직 ‘기이한 행동’으로 규정되고, 그녀는 타자의 시선에 의해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두 번째 장 ‘몽고반점’은 영혜의 형부이자 인혜의 남편인 예술가의 시점이다. 그는 예술이라는 이름 아래 자신의 욕망을 포장하며, 영혜의 신체를 탐닉한다. 그에게 영혜는 고통받는 존재도 아니고, 인간으로서 존엄을 가진 주체도 아니다. 그녀는 예술의 소재이자, 자신의 성적 욕망을 실현할 도구에 불과하다. 그는 영혜의 몸에 꽃을 그리며, 나체로 춤을 추게 하고, 그 과정을 영상으로 기록한다. 그리고 자신 역시 몽고반점이 있는 영혜와 교합함으로써, ‘자연과의 합일’을 경험하려 한다.

시점의 변화


이 장에서 가장 소름 끼치는 부분은, 형부가 스스로를 예술가로 정당화하며 영혜의 침묵을 해석하고 의미화하는 장면이다. 그는 영혜가 식물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이해’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왜곡된 욕망을 투사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영혜는 여전히 말이 없고, 저항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침묵은 곧 그의 ‘폭력’을 묵살하지 않는다. 이 모든 행위가 드러난 후, 그는 사회로부터 배제되지만, 진정한 피해자인 영혜는 여전히 말이 없다.

세 번째 장 ‘나무 불꽃’은 영혜의 언니 인혜의 시점이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폭력과 억압을 함께 견뎌온 인물로, 현실적으로 가족을 부양하고 삶을 유지하는 데 익숙해진 여성이다. 그녀는 영혜의 돌봄을 책임지게 되며, 점점 무너져가는 동생을 바라보며 죄책감과 분노, 절망을 동시에 느낀다. 인혜는 영혜를 이해하려 노력하지만, 그녀의 침묵은 해석되지 않는다. 영혜는 끝내 자신을 나무라고 선언하고, 식물처럼 빛을 먹고 물을 마시며 살아가려 한다. 그녀는 인간으로서의 삶을 거부하고, 자연과 하나가 되기를 소망한다.

이 장은 영혜의 침묵이 가장 깊고, 동시에 가장 절박하게 드러나는 부분이다. 그녀는 말을 하지 않지만, 그녀의 존재 자체가 일종의 저항이 된다. 인간이라는 껍질을 벗고 식물이 되고자 하는 그녀의 결정은, 인간 사회의 모든 규범과 폭력을 거부하겠다는 선언으로 읽힌다. 그녀는 살기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한 방식으로 살아가겠다는 결단을 내린 것이다. 말하자면, 영혜는 ‘죽은 듯’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아닌 방식으로 새롭게 살아가기를 택한 것이다.

채식주의자는 여성의 몸과 정신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타인의 욕망에 의해 해석되며, 결국 해체되는지를 날카롭게 보여준다. 영혜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시점에서 서술되지 않는다. 이는 그녀가 사회적으로 어떤 존재였는지를 상징한다. 그녀는 타인의 욕망을 비추는 거울이었고, 규범 속에 억지로 끼워진 존재였다. 그런 그녀가 꿈이라는 계기를 통해 스스로 선택한 것은 ‘말하지 않기’였다. 그 침묵은 약함의 표식이 아니라, 폭력적인 언어를 거부하고자 하는 의식적인 선택이었다.

독자에게 던지는 메시지


한강은 이 작품을 통해 말한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영혜들’을 사회 안에서 놓치고 있는가. 정상이라는 이름 아래, 상식이라는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폭력이 은폐되고, 강요되고 있는가. 또한, 타인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말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해는 때로 상대의 침묵을 짓밟는 일이 될 수 있으며, 타인의 경험을 자기 욕망에 맞게 해석하는 폭력이 될 수도 있다.

채식주의자를 읽으며 가장 가슴 아팠던 점은, 영혜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그녀는 말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말하지 않기를 선택했다. 그것은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었고, 동시에 언어가 더 이상 소용없다는 자각이었다. 그녀의 침묵은 파괴당한 언어에 대한 절망이었고, 동시에 그 언어를 쓰는 사회에 대한 단절의 선언이었다.

이 소설은 독자에게 불편함을 주고, 때로는 분노를 느끼게 하며, 무기력함에 빠지게 만든다. 그러나 그 불편함은 우리가 현실에서 외면하고 있는 수많은 진실을 마주하게 한다. 영혜는 단순한 인물이 아니다. 그녀는 우리 안에 존재하는 고통의 메타포이며, 인간 본성의 가장 깊은 내면을 응시하게 하는 거울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영혜는 식물이 되기를 원한다. 사람으로서의 삶이 불가능할 정도로, 인간 사회가 그녀를 파괴했기 때문이다. 그 선택은 비정상도, 광기도 아닌,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었다. 한강은 그 장면을 차갑고도 아름답게 묘사하며, 독자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과연 ‘인간답게’ 살고 있는가? 우리는 누군가의 고통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가? 우리는 ‘침묵’을 얼마나 경시해 왔는가?

채식주의자는 쉽게 읽히는 소설이 아니다. 그러나 반드시 읽어야 하는 소설이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과 폭력, 자유와 저항, 여성과 사회의 관계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만드는 작품이며, 단순히 한국 문학의 수작이라는 평가를 넘어, 세계 문학 속에서도 오래도록 기억될 만한 소설이다.